[서평] 바지 벗고 일하면 안 되나요?

By | 2018/05/23

"바지 벗고 일하면 안 되나요?" 이 제목을 보고, 이건 도대체 무슨 책인가 싶었다. 하지만 부제를 보니 그제서야 제목이 이해가 간다.

"워드프레스닷컴과 미래의 노동." 그래, 워드프레스라면 바지 벗고 일 할 수 있지.

워드프레스는 워낙에 유명한 오픈소스 기반의 블로깅 툴이라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내 블로그도 워드프레스로 운영하고 있고, 창립자도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관심있게 지켜보던 회사이다. 이 책은 마이크로스프트에서 무려 10년간 관리자로 일한 저자가 워드프레스에서 1년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리더십, 생산성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이크로소프트라면 뭔가 관료적이고 체계적일 것 같은 대기업인데, 이런 곳에서 관리자로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저자가, 자유롭고 수평적인 워드프레스에서 일하게 된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과연 저자는 정반대 성향의 회사에서도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이 궁금증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보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이 책이 처음 나오자마자 관심목록에 넣어두긴 했는데 어영부영 벌써 4년이나 흐른 후에야 읽게되었다.

워드프레스의 특이한 점은 원격으로 일한다는 점이다. 직원들이 각 세계 곳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사무실로 출근하는 개념이 없다. 물론 팀별로 원한다면 출근해서 일 할 수 있는 사무공간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이 자유롭게 근무하고 있다. 일하는 곳이 집이든 카페든 캠핑장이든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속한 팀의 팀원들과 무엇을 할지 정하고 정한 일을 일정에 맞게 잘 해내기만 한다면 그 외의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의가 필요할 때는 음성/영상 채팅으로 회의를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워드프레스 직원들이 바지 벗고 일할 수 있는 이유이자, 저자가 바지 벗고 일한 1년(The Year Without Pants)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다.

나도 전형적인 한국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커온 탓인지 스스로 규정에 얽매여 이를 지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남중-남고-공대-군대의 코스에서 잔뜩 관료적으로 생활하다가, 대학원에 오면서 외국인, 전문연구요원으로 현역 복무를 대체받은 학생들, 여학생들과 같이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관료적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깨기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가 직접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함께 풀어내는 리더십과 생산성 관련 이야기들 중 주옥같은 말이 무수히 많았다. 그 중 몇가지만 나열하자면,

문제 해결 과정을 살펴보면 조직도에 뭐라고 적혀 있든 상관없이 실제 권력이 누구에게 있을지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이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윗사람을 살펴보라. 그 조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날마다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문화가 달라진다.

사업 목표보다 특정한 원칙이나 기능을 중심으로 자기 업무를 규정하는 조직은 관료적으로 변하기 십상이다.내가 맡은 임무가 감자튀김이라고 회사에서 규정한다면 나는 감자튀김의 존재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저아할 것이다. 감자튀김이 사라지면 내 일자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객을 위해 곁들임 요리를 만드는 것이 내 임무라고 규정한다면, 감자튀김 말고 양파링이나 다른 신메뉴를 개발하자는 제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관리자 중에는 자기 자존심을 만족하게 하는 수단으로 회의 시간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나머지 구성원들이 시간만 낭비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형편없는 회의를 했어도 장시간 회의를 끝내고 나면 자기가 무대를 장악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흡족해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온라인 회의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에 대해 의심하지만, 대면 회의 역시 효과가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은 간과한다. 요즘 기업에서 하는 회의를 살펴보면 노트북을 열어놓고 회의가 얼마나 지루한지 메신저로 잡담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논의 중인 내용이 중요하면 사람들은 집중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따분한 일을 하는 회사라도, 만일 내가 50% 임금 인상을 적용받을 사람을 정하는 회의를 연다면 모두가 내 말을 경청할 것이다.

불필요한 전통을 제거하는 관리자는 진보한다. 제약을 걷어내 업무성과가 향상되어도 좋은 일이고, 업무성과에 변화가 없더라도 사기가 진작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계속 붙을고 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5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아침 9시까지 출근하려고 꽉 막힌 도로에서 사투를 벌이며 살아갈 것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나는 주로 출근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원생이다보니 지도교수님과 이것저것 이야기할 일이 많은데, 이메일이나 문자보다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그냥 전화로 했다면 금방 끝낼 회의를 채팅으로 하느라 시간을 많이 썻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일과 사적인 시간을 분리하기 위해. 하지만 대학원생 신분에 그런 것이 어디있으랴. 몸은 퇴근했지만 두뇌는 퇴근이 없다.

이 책이 나온게 2014년이라, 이 책에서의 워드프레스 문화가 지금도 똑같이 유지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직원도 훨씬 더 늘어났을 테고, 이런 직원 관리를 위해 어느 정도는 수직적인 인사 관리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심지어 지금은 워드프레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러 블로깅 툴들이 많다. 블로그 툴 뿐만 아니라 Medium이나 Steamit 같은 다양한 버전의 글쓰기 툴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워드프레스는 여전히 최고 인기있는 블로그 툴 중 하나이고,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직원들은 최대한 창의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경쟁 시스템들 사이에서도 잘 살아남으리라 생각된다.

자, 나는 이제 어떻게 이 책을 통해 배운 리더십과 생산성을 내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원격 근무보다는 직접 출근해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과 개인 시간을 분리하고, 일 하는 시간에는 딱 일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고, 회의도 화상채팅보다는 직접 대면해서 회의를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대신, 다른 사람도 나처럼 직접 출근하고 오프라인으로 회의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덜 갖게 되었다. 어디서든 나와 소통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생산성을 높이는데 문제가 없다면 내가 바지에 셔츠를 입고 일한들, 다른 사람이 바지 벗고 일하든 내가 신경쓸 바가 아닌 것이다.